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국령 우간다 계획 (문단 편집) == 전개 과정 == 발단은 [[러시아]]의 [[반유대주의]]에서 시작되었다. 러시아에서는 [[시온 의정서]] 사건으로 반유대주의가 극에 달하고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이 이어졌다. 견디다 못한 유대인들은 러시아 제국을 빠져나와 [[유럽]] 각국과 [[미국]]으로 이주했는데, 당시 러시아 제국을 탈출한 유대인 중 약 7%에 해당하는 14만여 명이 영국으로 난민이 되어 몰려왔다.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시 영국 [[식민지]] 장관 조지프 체임벌린이 [[시오니즘]]의 지도자였던 [[테오도르 헤르츨]]에게 영국으로 몰려드는 동유럽 출신 유대인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영국령 동아프리카 마우 고원의 약 13,000제곱킬로미터의 땅을 줄 테니 그곳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.[* 일명 '우간다 계획'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것과 달리 정작 해당 지역은 우간다가 아니라 [[케냐]]에 있다. 물론 해당 지역이 우간다 보호령에서 케냐로 이관된 지 얼마 안 되었을 시점이었다.] 당시 러시아 제국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유대인 상당수가 남아공 식민지로 재이민하던 상황이었기에[* 1880년대 약 4,000여 명이던 남아공 유대인 인구는 이에 힘입어 1920년대 4만여 명으로 증가하기 이른다. 남아공으로 이주한 유대인 절대다수가 [[리투아니아]]에서 영국으로, 다시 영국에서 남아공으로 이민한 케이스였다.] 영국 입장에서 완전 터무니없는 제안을 한 것도 아니었다. [[테오도르 헤르츨]]은 1903년 바젤에서 열린 제6차 [[시오니즘]] 총회에 이 문제를 안건으로 올렸고 회의에서는 이 안건을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. 비록 1897년 바젤에서 열린 제1차 시오니즘 총회에서 유대인 국가를 팔레스타인에 건설하기로 결정을 내렸고 유대인들의 [[팔레스타인]] 이주가 진행 중이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굳이 영국의 제안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느냐는 반대 의견도 있었지만, 팔레스타인이 본질적으로 [[오스만 제국]]의 통치 아래에 있고 이미 그곳에는 유대인들보다 수적으로 훨씬 많은 [[아랍인]]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외부에서 이주해오는 유대인들과 충돌할 위험성도 컸기 때문에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재건하는 게 요원하다는 현실론도 만만치 않았다. 그 과정에서 러시아 유대인 대표가 강력하게 반발하며 퇴장하는 일도 있었지만 결국 투표 결과 총원 295명 중 177명의 찬성으로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. 1904년, 시오니즘 총회는 세 명의 대표를 영국이 제안한 마우 고원으로 보내서 현지 사정을 파악하게 했다. 마우 고원은 [[적도]] 바로 아래 지점이긴 했지만 해발고도가 높은 편이라 유럽인들이 거주하기에는 온화한 기후라는 평가를 받았다. 그러나 [[사자]] 같은 맹수들이 많고 현지 원주민인 [[마사이족]] 등이 유대인들의 이주를 반길 것인가에 대해 대표들은 의구심을 가졌다. 결국 내부 논의를 거쳐 1905년 시오니즘 총회는 이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하기로 최종 결정했다. 그러나 헤르츨에게 체임벌린을 소개시켜주면서 우간다 계획 떡밥을 연 이즈레일 장윌 같은 인물들은 '유대인 국가 세우는 게 중요하지, 그 나라의 위치가 꼭 팔레스타인일 필요는 없다'고 격하게 반발하면서 [[아시아]]나 [[아프리카]] 어디든 적당한 곳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자고 주장하며 '유대 영토주의 협회'를 조직하고 세계 각지에 유대인 국가 수립을 모색하기도 했다. [[제2차 세계 대전]] 때는 [[윈스턴 처칠]]이 [[홀로코스트]]를 피해 망명한 유대인들의 피난처로 영국령 우간다를 다시 제시했지만 시오니즘 총회는 '''"[[팔레스타인]] 유대인 이주 제한 철폐가 중하지 우간다가 대수냐!"'''라면서 거부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